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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소멸 지역탐구

마을을 떠난 청년, 3년 후 돌아온 이유

by around-the-worlds 2025. 6. 17.

마을을 떠난 청년, 3년 후 돌아온 이유

- 떠날 때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다시 이 마을에 돌아온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1. 도시에서의 3년, 채워지지 않은 공백

 

서울에서의 3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처음엔 들뜬 마음으로 시작한 도시 생활이었다. 매일 다른 커피를 마시고, 주말이면 새로운 식당을 찾아가며, ‘도시 청년’이라는 말이 내 삶을 어느 정도 대변해주는 듯했다. 지하철로 출퇴근하고, 야근을 하고, 배달 음식을 먹으며 일상은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 익숙함 안에 이상하게도 공허함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늘 사람들 속에 있었지만, 누구와도 깊게 연결되지 않는 느낌. 회사에서는 언제든 대체 가능한 구성원이었고,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누가 옆집에 사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내가 아파도, 기뻐도, 슬퍼도 그 감정을 공유할 사람이 없었다. 사회에 적응하려 애쓰면서도 내 존재가 뿌리내릴 수 있는 곳이 어딘지를 자꾸 묻게 됐다. 마을을 떠날 땐 촌스럽고 숨 막힌다고 여겼던 고향이, 어느 순간부터 마음 한켠을 자꾸 두드렸다. 회사에서 퇴사하고 잠시 멈춘 시기, 나는 나라는 사람의 시작점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결국 나의 일부는 여전히 그 들판과 골목, 오래된 담벼락에 남아 있었다. 도시에서 잃어버린 건 단순한 여유나 재미가 아니라,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 사람인가에 대한 확신이었다.

 

마을을 떠난 청년, 3년 후 돌아온 이유

 

2. 돌아온 첫 해, 낯선 듯 익숙한 마을

 

다시 고향 마을로 돌아왔을 때, 나는 스스로를 이방인처럼 느꼈다. 고향이지만 낯설었고, 익숙하지만 어색했다. 마을의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그 풍경을 바라보는 나의 눈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고, 논두렁에 핀 들꽃 하나가 소중하게 다가왔다. 도시에서는 지나쳤을 법한 풍경들이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생각보다 냉정했다. 어떤 어르신은 반갑게 “왔는갑다!” 하고 웃어주셨지만, 누군가는 “서울이 안 맞았나보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나는 그 말 속에서 여전히 ‘떠났던 사람’, ‘외부인’이라는 거리감을 느꼈다. 그래서 일부러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경로당에 가서 어르신들 안부를 묻고, 마을 회관 청소에 자원하고, 어린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활동에 참여했다. 처음엔 조심스레 바라보던 시선들이 점점 변해갔다. 동네 잔치에 초대받고, 텃밭 고랑을 같이 타고, 이장님께 고민을 상담하게 되기까지. 그렇게 점차 나는 다시 이 마을의 일부가 되어갔다. 마을은 단지 돌아온다고 나를 품지 않았다. 내가 그 안에서 진심을 다해 움직일 때, 비로소 그 진심이 닿았고, 관계는 천천히 회복되었다. 뿌리는 그 자리에 있었지만, 다시 물을 주고 햇빛을 받기 전까지는 꽃을 피울 수 없다는 사실을 그때 절감했다.

 

3. 내 자리를 만든다는 감각

 

도시에서는 늘 ‘자리’라는 말을 들었다. 일자리를 얻고, 자리를 잡아야 하고, 자리싸움에서 밀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만 그 자리는 언제나 경쟁을 전제로 했고, 결국은 남이 만든 구조 안에 얹혀 들어가는 것이었다. 마을로 돌아온 뒤 나는 처음으로 ‘자리를 만든다’는 감각을 가질 수 있었다. 마을에 방치된 낡은 빈집 하나를 얻어, 직접 수리하면서 작은 로컬 카페를 열었다. 기계 하나 들여놓고, 직접 만든 나무 간판을 걸었을 때, 처음으로 ‘이곳이 나의 공간’이라는 자부심이 생겼다. 카페라기보다 동네 사랑방에 가까운 공간이었다.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들러 고구마를 맡기고, 나는 그 고구마로 구운 파이를 나누었다. 마을 아이들은 숙제하다 졸리면 여기 와서 쉬고, 친구들은 도시에서 내려와 이 삶을 부러워했다. 수입은 많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큰 만족감이 있었다. 내 공간에서, 내가 선택한 방식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는 것. 처음으로 삶이 내 손 안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도시에서는 언제나 ‘다음’을 위해 움직였지만, 여기에서는 ‘지금’을 살아내고 있었다. 내 자리란 누군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만든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한 해였다.

 

4. 다시 돌아왔기에 알게 된 것들 

 

만약 돌아오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이 감정을 영영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시골의 삶이 무조건 낭만적인 것도 아니고, 도시에서 겪던 불안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고, 생활은 여전히 손이 많이 간다. 하지만 도시의 소음과 속도 속에서 무뎌지고 잊혔던 감각들이 이곳에서는 아주 또렷하게 깨어난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걸 실감하고, 논두렁에 핀 꽃 이름을 기억하게 되고, 창문 너머로 비 내리는 냄새를 먼저 맡는다. 계절의 변화가 달력보다는 흙냄새와 빛깔로 먼저 다가오고, 사람들의 표정과 말투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이제는 동네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외우게 되었고, 어르신 중 누가 언제 병원에 가는지, 어떤 집의 강아지가 새끼를 낳았는지, 자연스럽게 알고 챙기게 된다. 경로당에 들러 라디오를 고쳐드리면, 돌아오는 길에 삶은 감자 봉지를 건네받고, 마을 행사에 쓸 간식을 만들며 서로의 기쁨과 피로를 나눈다. 이런 일들이 별것 아닌 일상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끈한 관계가 자란다. 누구도 특별하지 않지만, 모두가 서로를 기억하고 알아보는 삶. 그 안에서 나는 안정감을 얻고,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분명한 감각을 다시금 느낀다.

물론 여전히 불안은 있다. 언제까지 이 마을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경제적으로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도시에서 누리던 자극적 재미나 기회의 일부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누군가는 내가 돌아온 걸 ‘포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점점 더 확신하게 된다. 도시에서 누리던 자유는 사실관계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고립된 선택지였고, 이곳에서의 삶은 덜 자유롭지만 더 따뜻하고 단단하다. 불편하지만 함께 손발을 맞추며 살아가는 관계 속에서, 오히려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있다는 역설을, 나는 이곳에서 몸으로 배웠다.

돌아온다는 것은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는 것도 아니고,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것도 아니다. 돌아온다는 건,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대화하는 시간이며, 그 사이에서 다음을 설계하는 자리다. 내가 태어난 곳, 나를 처음 알아본 사람들과 다시 호흡하며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가장 근본적인 삶의 회복일지도 모른다. 내가 이 마을에 돌아온 것은 단지 물리적 귀향이 아니라, 내 삶의 중심을 다시 찾기 위한 행위였고, 그 선택이 옳았다는 건 하루하루가 증명해 주고 있다.

지금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나답게, 가장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보며 성공을 꿈꾸겠지만, 나는 이 들판 너머로 지는 해를 보며 충만함을 느낀다. 누군가는 바쁘게 움직이며 하루를 채우지만, 나는 여백과 온기 속에서 하루의 밀도를 새긴다. 삶은 결국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자신과 얼마나 진실하게 마주하고 있느냐의 문제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여기서 나와 깊이 마주하며 살아간다. 그 시작은 단 하나의 선택에서 비롯되었다. 돌아온다는 선택.
그것이 내 인생을 바꾼 가장 조용하고 강한 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