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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소멸 지역탐구

폐교가 낙찰된 날, 주민들의 마지막 교가 합창

by around-the-worlds 2025. 5. 24.

폐교가 낙찰된 날, 주민들의 마지막 교가 합창

– 사라진 학교의 기억, 마을 공동체의 마지막 노래


1. 마지막 경매 공고, 폐교가 '물건'이 되던 날

 

그 마을의 초등학교는 1960년대 후반 개교해 수십 년간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선생님의 훈화가 끊이지 않던, 말 그대로 마을 공동체의 심장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시골에 불어온 인구 감소의 바람은 학교도 비껴가지 않았다. 2005년, 단 한 명의 입학생과 함께 그해 마지막 졸업식을 치른 뒤, 더는 학교의 기능을 이어가지 못했다. 이듬해 ‘휴교’라는 명목으로 문을 닫았지만, 사실상 그때부터 폐교의 길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몇 년간 방치되던 이 교정은 마침내 지방자치단체의 유휴 자산 정리 대상 목록에 올라 공매 절차를 밟게 되었다.

공고문이 붙은 그날, 주민들의 반응은 복잡했다. 외지 투자자들에게 낙찰될 것이라는 예감이 돌면서 마을 어르신들은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는 “학교가 건물은 맞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지 않소”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 학교는 단지 교육시설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마을 회관처럼 쓰였고, 명절이면 자녀들이 돌아와 운동장에서 삼삼오오 모여 음식을 나누던 장소이기도 했다. 마을 잔치도, 동네 아이들 생일 파티도, 심지어 장례식 이후의 다과회까지 이 학교에서 열렸다. 주민들에겐 단순한 ‘토지와 건물’이 아니라, 수십 년을 이어온 마을 삶의 중심이자, 세대 간 기억이 교차하던 장소였다.

학교가 공매에 붙는다는 것은, 그 중심이 이젠 더는 마을의 것이 아니라는 선언이었다. 소유권 이전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과 소속의 문제가 된 것이다. 학교가 팔린다는 소식이 돌자 주민들은 “이대로는 보낼 수 없다”며 하나둘씩 움직이기 위해 시작했다. 그들은 어떤 공식 행사나 관 주도의 기념식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들의 방식으로, 이 공간과의 마지막 이별을 준비하기로 했다. 바로, 마지막으로 함께 교가를 부르자는 것이었다. 교육은 끝났지만, 배움의 기억은 그들에게 여전히 살아 있었고, 그 추억을 노래로 기록하려는 이들의 움직임은 점점 더 많은 주민에게 닿기 위해 시작했다.


2. 다시 모인 졸업생들, 교정에 울려 퍼진 노래

 

폐교 매각 계약서에 최종 도장이 찍히는 날. 학교 앞 운동장에는 예상외의 광경이 펼쳐졌다. 삼삼오오 마을 어귀에서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이 학교의 졸업생이었다. 나이는 60대에서 80대까지 다양했고, 그중 몇몇은 휠체어나 지팡이에 의지해 힘겹게 교정을 밟았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들 속엔 젊은 얼굴도 더러 보였다. 타지에서 자란 손주들의 손을 붙잡고 함께 찾아온 이들이었다. 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추억을 끌어안고 있었다. 누군가는 낡은 교복을 꺼내 입고, 누군가는 희미해진 졸업앨범을 소중히 품에 안고 있었다.

이날 모인 이들의 목적은 하나였다. 학교와의 마지막 작별을, ‘노래’로 하고자 함이었다. “푸른 언덕 넘어 아침 햇살 비추면, 우리 배움의 터전 환히 빛나네...” 첫 소절이 흐르자, 눈가가 촉촉해지는 이들이 많았다. 오래전 함께 손잡고 소풍을 갔던 친구들, 책상을 사이에 두고 경쟁하던 급우들, 매일 교문 앞에서 인사를 나누던 선생님들의 얼굴이 노래 속에서 하나둘 떠올랐다. 이미 철이 든 이들의 목소리는 기교보다는 진심이었고, 조화로운 화음보다는 각자의 감정이 뒤섞인 울림이었다.

그 노래는 단지 과거를 추억하는 도구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잊힌 시간 속에서 다시 살아난 공동체의 선언처럼 들렸다. 학교는 이제 곧 다른 용도로 쓰일 예정이지만, 그날만큼은 분명히 다시 학교였다. 사람들의 웃음과 눈물, 목소리와 침묵이 공존하는 풍경 속에서, 교육은 다시 살아 숨 쉬었다. 교가 속에는 그들이 겪어낸 시대의 고단함, 그 시절 품었던 꿈, 그리고 무엇보다 이 마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가 담겨 있었다. 이 노래는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공동체가 마지막으로 자신을 지켜낸 방식이었다. 그것은 교실이 없어진 자리에서 피어난, 존엄한 작별의 의식이었다.

폐교가 낙찰된 날, 주민들의 마지막 교가 합창


3. 학교는 사라졌지만, 기억은 남았다

 

계약이 체결된 이후, 학교는 다시 ‘공간’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이후 이곳이 어떤 형태로 재탄생할지는 미지수였다. 몇몇은 카페나 소규모 창작센터로의 활용 가능성을 언급했고, 또 누군가는 물류창고나 개인 창고로 바뀔 것이라 추측했다. 그러나 어떤 용도로 바뀌든,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 이곳은 여전히 ‘학교’였다.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폐교 후 수년간 마을의 인구는 급속히 줄었다. 한때 300여 명이던 인구는 이제 50명 남짓, 대부분이 고령층이다. “학교가 없어지니까 마을이 텅 빈 기분이 들어요. 어디다 중심을 두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라는 한 졸업생의 말은 단지 감상이 아닌, 현실이었다. 폐교는 물리적 건물의 철거가 아니라, 마을의 정체성과 연결망이 끊어지는 과정이었다. 단절은 곧 해체로 이어지고, 해체는 공동체의 소멸을 재촉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냥 기억을 흘려보내지 않았다. 그날의 합창은 영상을 통해 유튜브에 공개되었고, 수천 개의 댓글이 달렸다. “나도 이 학교 나왔어요.” “눈물이 나네요.” “저도 저 운동장에서 놀았는데...” 누군가는 그 영상을 수십 번 돌려보며 추억을 되새겼다. 사람들은 학교에 대한 기억을 나누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를 되짚었다.

이 마을 주민들은 교가의 가사를 커다란 패널에 새기고, 폐교의 담벼락 옆에 세워두었다. 공식적인 표지판은 아니지만, 그들에게는 더 의미 있는 문화적 표식이었다. 지나가는 이가 그것을 읽는다면, 그것이 바로 이 마을이 남긴 마지막 수업이자, 교육이 남긴 비가시적 유산이 될 것이다.


4. 사라져 가는 교육, 소멸하는 마을들

 

대한민국에는 현재 3,800곳이 넘는 폐교가 존재한다. 그중 대부분은 농촌과 산간, 즉 교육 접근성이 취약한 지역이다. 그 지역들에는 공통된 흐름이 있다. 출산율이 0명에 가까워지고, 입학생이 없어진다. 이어지는 것은 학교의 휴교, 그리고 폐교. 그리고 마을의 급속한 인구 이탈과 고령화. 결국은 마을 소멸. 이것은 단지 교육의 위기가 아니라, 지방 생태계 전체의 해체를 상징하는 연쇄적 구조다.

학교가 사라진다는 건 단순히 수업이 멈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한 지역의 미래 가능성이 차단된다는 신호이자, 젊은 세대가 더 이상 이곳에서 삶을 계획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다. 학교가 없는 마을엔 새로운 가정이 들어올 이유가 없다. 결국 삶의 터전이 텅 비고, 공동체는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 악순환을 막기 위해선 단지 학교를 유지하는 것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폐교의 아쉬움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어떤 기억이 살아남았는지, 어떻게 그 기억이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날, 교가를 부른 노인들의 말은 그래서 더욱 큰 울림을 준다. “이제 여길 누가 다시 학교라 부러진 않겠지만, 우리에겐 이곳이 영원히 학교야.” 이 말에는 단순한 향수가 아닌, 공동체를 이어가려는 깊은 책임감이 담겨 있었다. 그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 불씨 하나가 또 다른 희망의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