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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소멸 지역탐구

응급차 오기 전, 노인이 자전거로 실려 가는 마을의 현실

by around-the-worlds 2025. 5. 24.

응급차 오기 전, 노인이 자전거로 실려 가는 마을의 현실

– 의료 사각지대 속 마지막 생존 방식


1. 응급차가 오지 않는 마을

 

전라북도 내륙의 한 산간 마을 C리.
행정상으론 군 단위에 속하지만,
실제로는 분교도 폐쇄된 채 수십 년간 도시와 단절된 채 살아온 공간이다.
이 마을의 가장 큰 문제는 의료 접근성이다.
특히 응급의료 서비스의 절대적 결핍이 심각한 상태다.

마을로 향하는 마지막 2km 구간은 여전히 비포장 상태이며,
산비탈을 깎아 만든 길은 겨울철이면 눈과 얼음으로 위험해진다.
이에 따라 119구급차는 마을 입구까지만 진입할 수 있으며,
마을 중앙까지는 도보로 약 20~25분이 소요된다.
이 거리조차 대부분 75세 이상 주민들에겐 **‘사선’**처처럼 느껴지는 공간이다.

지난겨울, 83세의 노인이 뒷산에서 넘어져 움직이지 못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구급차는 눈길에 갇혀 마을 초입도 넘지 못했다.
결국 마을 주민 두 명이 낡은 리어카에 담요를 깔고,
노인을 조심스럽게 태운 뒤 언덕을 따라 약 700미터를 끌고 내려왔다.
이 일은 뉴스에 ‘훈훈한 미담’으로 보도되기도 했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생사를 건 필사적 이송이었다.

이런 장면은 이 마을에서 드문 일이 아니다.
“환자가 나오지 못하면, 구급차는 그냥 돌아가요.
결국 우리가 들고 나오든 끌고 나오든 해야 해요.”
이장의 말처럼, 공공 시스템이 닿지 못하는 지점에선
주민의 몸이 의료체계의 마지막 연결 고리가 되고 있다.


2. 노인을 자전거에 태운다는 의미

 

C이에는 차량이 거의 없다.
운전면허를 가진 주민 대부분은 이미 반납했고,
마을에 상시 운행되는 차량은 소형 트럭 한 대뿐이다.
그나마도 개인이 소유한 것이고,
응급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그래서 이 마을에선 **‘응급 자전거’**라는 말이 통용된다.
그 말이 처음 들렸을 땐 농담처럼 들렸지만,
실제로 마을 주민들이 쓰는 개조된 기어식 자전거에는
뒤에 작은 평상 형태의 나무판이 달려 있다.
긴급 상황 시, 이 구조물에 환자를 눕히고
두 명이 번갈아 가며 자전거를 밀어
마을 입구까지 운반하는 방식이다.

한 주민은 “솔직히 위험하죠.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에요.
근데 방법이 없잖아요.
지금 기다리면 그 사람이 죽을 수 있으니까요.”라고 말한다.

이 자전거는 더 이상 일상용 교통수단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비공식 수송 시스템으로 변모한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산에서 내려오는 주민의 뒷좌석에
83세 노인이 실려 있는 모습은
도시 사람들에겐 영화적 상상이겠지만,
이 마을에선 현실이며,
심지어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문제는 단지 ‘자전거를 쓴다’는 데 있지 않다.
응급 환자를 이동 중 재부상시키거나,
심정지 등 심각한 상황에 놓인 상태에서 비의료적 이송은
2차 피해, 심지어 사망률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구조는 그걸 선택할 수 없게 만든다.
이 마을에선 ‘의료적 안전’보다 ‘시간 안에 움직이는 것’이
더 절실한 생존 조건이 되었다.

 


3.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고립된 마을들

 

이 마을의 사례는 결코 특수한 사례가 아니다.
전국 수많은 농산어촌 지역이
이와 유사한 구조 속에서 ‘의료 고립’ 상태를 겪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응급의료 취약지 현황에 따르면,
전국 기초자치단체 중 약 40%가
응급차 도착까지 20분 이상 소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 ‘20분’은 숫자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그 20분을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마을들이 많다.
버스가 하루 두 번, 심지어 눈 오는 날엔 아예 끊기는 마을.
응급차가 도착할 수 있는 도로가 없는 마을.
GPS조차 잘 잡히지 않아 위치 안내도 어려운 곳.

이런 마을의 존재는
의료 시스템의 전국적 균형이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경고다.
의료기관 분포, 응급 이송 수단, 지역 거점 병원의 거리,
보건소 접근성 등 모든 측면에서
농촌 지역은 도시보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구조에 놓여 있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을 제도적으로 메울 장치도 거의 없다.
순회 진료는 월 1회 이하 수준이며,
응급 환자에 대한 공공 대응 매뉴얼도 지역별로 상이하다.
결국 주민들은 매번 “이번에도 운 좋게 넘겼다”는 식의
비공식적인 생존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4. 응급 생존권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 필요

 

사람이 아프거나 다쳤을 때
‘누군가 도와줄 것’이라는 신뢰,
‘병원에 갈 수 있다’는 기대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권리 중 하나다.

하지만 이 마을처럼
자전거에 실려야만 병원에 도달할 수 있는 지역에서는
그 기본권조차 사실상 박탈된 상태라고 봐야 한다.
단지 편의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존엄한 생존의 문제다.

정부는 농촌 고령화 대응과 의료 복지 강화를 이야기하지만,
실질적인 제도는 여전히 도시 중심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구호가 의료 문제만큼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다.

지금 필요한 것은 중간 단계 의료 대응 체계의 구축이다.
마을 단위 응급 키트(AED 포함),
간이 응급 대기소 마련,
비상 수송 장비 지원,
그리고 무엇보다 지역 내 응급 지원 인력 양성 제도화가 절실하다.

한 명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들이
도시와 농촌 구분 없이 제공되어야 한다.
지금 자전거에 이웃을 태워
산길을 내려오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공동체의 따뜻한 이전에, 국가의 구조적 실패를 의미하는 신호다.

그 자전거는 감동의 상징이 아니라,
국가가 놓치고 있는 책임의 실루엣이다.
그 자리에 구급차가 설 수 있도록,
그 자전거가 더 이상 환자를 싣지 않아도 되도록,
우리는 더 이상 늦기 전에
제도적 대답을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