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떠난 뒤, 주민이 만든 ‘비공식 진료소’
– 의료 사각지대 속에서 자생하는 돌봄 공동체의 현실
1. 유일한 보건지소 폐쇄, 마을은 의료 고아가 되다
경북 북부, 행정구역상으론 소도시에 속하지만 도시보다 훨씬 먼 삶의 속도를 가진 산간 마을 B리.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국도를 따라 40여 분, 다시 농로처럼 굽이진 시골길을 따라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이 마을은
현재 9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고령화 마을이다.
전체 주민의 평균 연령은 74세, 80대 이상 고령자 비중은 절반을 훌쩍 넘긴다.
그런 이 마을에 과거엔 단 하나의 의료시설이 있었다.
보건복지부 소속 간호사가 주 3일씩 순회하던 작은 보건지소였다.
진료한다기보다는 상처 소독, 혈압 측정, 당 체크와 같은 기초 건강 관리를 도와주는 곳이었지만
이 보건지소의 존재는 마을 주민들에게 있어 ‘건강을 지키는 유일한 손’이었다.
하지만 2021년, 보건지소는 예산 감축과 인력 부족이라는 이유로 운영을 중단했다.
지속하여 폐쇄되던 날, 이장과 마을 어르신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현판이 철거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보건지소가 사라진다는 건 곧 병원에 가기 위해 읍내까지 차로 30~40분 이상을 가야 하고,
운전이 불가능한 고령자들에겐 병원 진료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현실이라는 걸.
이장은 지자체에 여러 차례 민원을 넣었다.
직접 군청까지 올라가 읍장과의 면담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늘 같았다.
“의료인 배치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인근 병원 이용을 권장해 드립니다.”
하지만 ‘이용을 권장’받은 주민들의 현실은,
버스가 끊긴 산골에서 병원에 가기 위한 방법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마을은 이름뿐인 ‘의료 접근권’을 가진 채 사실상 의료 고아로 방치되었다.
2. 주민들이 만든 비공식 진료소의 시작
시간이 흐르면서 고혈압, 당뇨, 관절 질환으로 고통받는 주민들이 늘어났다.
아프다고 해서 갈 병원이 없었고, 심지어 작은 통증조차 방치되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주민들 사이에서 작지만 중요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이대로 아무도 안 도와주면, 우리가 알아서 해야지.”
그 말 한마디가 씨앗이 되어 마을회관의 한구석이 바뀌기 위해 시작했다.
먼저, 사용하지 않던 회의실 공간을 정리하고,
폐쇄된 보건지소에서 기증받은 병원 침대를 들여왔다.
한쪽에는 혈압계와 체온계, 그리고 응급용 산소통이 비치되었다.
서랍장에는 주민들이 각자 가져온 파스, 소염제, 당 보충용 젤리, 상비약이 정리되었다.
전문 약국이 아닌, 가정에서 흔히 쓰는 생활 약들이 모인 그 공간은
이제 마을에서 가장 필요한 공간이 되었다.
진료소 운영의 중심은 67세 김 모 할머니였다.
젊은 시절 조산사로 일했던 경험이 있었던 그는
마을에서 가장 건강 상식이 풍부한 사람으로 통했다.
그녀는 복잡한 처방은 할 수 없지만,
응급 시 필요한 조치나 기본적인 대응은 몸으로 알고 있었다.
어르신 한 명이 갑자기 의식을 잃었을 때,
그녀가 가장 먼저 심호흡을 유도하고 다리 밑에 베개를 넣으며
기초적인 응급 처치를 한 덕에 생명을 구한 일도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마을 사람들은 그 공간을 ‘진료소’라고 부르기 위해 시작했다.
진료소라는 이름은 정식 명칭이 아니었다.
허가도, 인증도 없었고, 의료 행위도 없었다.
그저 ‘아플 때 잠시 기대어 쉴 수 있는 공간’일 뿐이었지만
그 공간은 어느새 마을의 중심이 되어갔다.
어르신들은 그곳에 들러 서로 혈압을 재고,
상태를 체크하며 “오늘은 수치가 괜찮다”, “이제 짠 걸 좀 줄여야겠다” 같은 대화를 나눴다.
사람들이 사라진 마을에서, 건강을 중심으로 다시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3. 국가 시스템의 공백을 메우는 비공식 의료망
이 진료소는 말 그대로 ‘자생적인 시스템’이다.
마을 예산이나 정부 지원금은 한 푼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도 금요일마다 주민 자율 건강 점검 모임이 열리고,
기초 수치를 체크하며 식단을 조절하고,
어르신들끼리 약 복용 여부를 확인해 주는 비공식 건강 커뮤니티로 기능하고 있다.
하지만 이 구조는 ‘의료 체계’가 아니다.
진단도, 처방도 할 수 없고,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법적 책임 소재조차 불분명하다.
김 할머니는 말한다.
“내가 잘못해서 누가 잘못되면 어쩌나, 그게 제일 걱정이야.”
그 말속에는 고맙다는 주민들의 마음과 동시에,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함께 담겨 있다.
이런 형태의 비공식 진료소는 사실 전국 곳곳에서 조용히 늘어나고 있다.
의료 서비스가 닿지 않는 소외 지역에서
주민들끼리 만든 건강 모임, 응급 대응 소, 보건 쉼터 등의 이름으로 불리지만
모두 공통점은 ‘제도 밖에서 생긴 것’이라는 점이다.
문제는 이러한 자생적 구조가
‘제도화되지 않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의료인도 아니고, 운영비도 없으며,
위급 상황에선 결국 외부 지원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 시스템은 임시방편일 뿐, 진짜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4. 돌봄의 책임이 주민 개인에게 전가되는 사회
비공식 진료소의 존재는 감동적이지만,
그 이면에 있는 무서운 현실은
국가가 책임져야 할 공공 의료의 의무를
결국 ‘노인 개인’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67세 김 할머니 역시 최근 건강 악화를 호소하고 있다.
관절 통증이 심해 회관에 자주 나갈 수 없게 되었고,
기억력도 예전만 못하다.
그녀가 자리를 비운 뒤, 진료소는 자연스럽게 멈춰버렸다.
약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약을 챙겨줄 사람은 없었다.
이 구조는 한 명이 사라지면 전체가 무너지는 구조다.
단 한 명의 헌신으로 마을의 건강이 지켜지고 있다면
그건 체계가 아니라 우연에 의존한 구조에 불과하다.
지방 의료의 현실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젊은 의사는 오지 않고,
공공의료 예산은 줄고,
응급 상황은 늘어나는 상황 속에서
정부는 여전히 ‘장기 계획’을 이야기하지만
마을은 지금 무너지고 있다.
지금이라도 국가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비공식 진료소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역할을 정식 의료 인프라로 승격시키는 것.
찾아가는 보건 서비스, 순회 진료 확대,
기초 보건 인력 재배치와 같은
작지만 개입이 필요하다.
김 할머니가 말한다.
“나는 이제 힘들어서 못 해.
누가 대신 좀 와줬으면 좋겠어.
우리 마을도 아프면 병원 가게 해줘야지.”
그 말은 단지 한 사람의 소망이 아니라,
이 나라 수많은 소외된 마을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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