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회관이 병원, 유일한 응급 담당은 78세 할머니
– 의료 공백 시대, 지방 마을의 기이한 응급 체계
1. 의료시설 없는 마을, 회관이 응급실이 되다
강원도 남부 깊숙한 산골, 지형은 가파르고 이동 시간은 길다.
이런 조건 탓에 A 마을은 외부에서 거의 접근하지 않는 '고립된 생활지대'가 되었다.
이 마을에 거주하는 주민은 약 90명.
그중 80세 이상 고령자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청년층은 이미 20여 년 전 떠났고, 초등학교는 2008년에 폐교됐다.
현재 마을에는 의료시설은커녕 약국도 없으며,
주민 누구도 면허 있는 의료인을 알지 못한다.
응급차가 오려면 읍내에서 40분 이상이 걸리고,
산간 지역 특성상 도로 상황이 좋지 않아 눈이 오거나 비가 내리면
도착 시간은 한 시간 이상으로 늘어난다.
그래서 이 마을에선 ‘응급 상황은 자력으로 버텨야 한다’는 공감대가 생겨났다.
그 결과, 마을회관은 자연스럽게 비공식 응급실 역할을 하게 됐다.
이장이 마을 회의 때마다 강조했던 것은 “응급차를 기다리다 죽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혈압계, 체온계, 간단한 소독약, 당 조절용 사탕과 포도당 음료,
그리고 주민들이 모아둔 약상자까지 모두 회관 한쪽 벽에 놓이게 되었다.
의사가 없으니 서로 아플 때 이곳으로 향한다.
“심장이 두근거리면 무조건 회관으로 가.”
이 말은 공식 매뉴얼이 아니라
그 마을의 암묵적 생존 규칙이 되었다.
2. 78세 할머니, 마을의 유일한 응급 대응 자
이 응급 체계의 중심에는 78세 김 씨 할머니가 있다.
사람들은 그녀를 ‘할머니 간호사’라고 부른다.
그녀는 간호사가 아니지만,
젊은 시절 서울에서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땄던 경력이 있다.
이미 그 자격은 실효됐고,
그녀도 본래는 단순히 귀촌을 위해 고향으로 내려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마을의 구조적 의료 공백은
그녀를 자연스럽게 비공식 응급 담당자로 만들었다.
쓰러진 이웃에게 심호흡을 유도하고,
저혈당 증상을 보이는 주민에게 사탕과 물을 챙기고,
열이 나면 해열제를 나눠주고,
119가 도착하기 전까지 혈압을 재고 상태를 전달해 주는 역할까지 맡는다.
전화가 울리면 그녀는 말한다.
“일단 눕히고, 담요 덮고, 내가 곧 간다.”
자신도 허리디스크와 무릎 통증을 앓고 있지만
마을에서는 그녀가 사실상 유일한 응급조치 자다.
“내가 쓰러지면 이 마을은 끝장이지.”
그녀는 웃으며 말하지만
그 말속엔 웃을 수 없는 진담이 섞여 있다.
왜냐하면 이 마을에는 김 할머니 다음을 잇는 사람도,
그녀의 역할을 대체할 시스템도 없기 때문이다.
3. 응급시스템의 부재는 곧 생명 리스크
최근 10년간 이 마을에서 응급 의료로 사망한 사례는 8건.
그중 절반 이상은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숨을 거두었다.
대부분은 심근경색이나 호흡곤란 같은 돌발 상황이었다.
119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지만,
산길을 넘고 좁은 도로를 지나 도착하기까지는
이미 적기가 지난 경우가 많았다.
일부 주민은 헬기 요청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준은 까다롭다.
이착륙장 확보, 의사의 사전 진단, 날씨 등의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만
응급헬기 투입이 가능하다.
사실상 ‘현실에서 불가능한 절차’에 가까운 것이다.
이 마을은 원격진료 확대 대상에서도 소외돼 있다.
인터넷 LTE도 불안정한 탓에
기초적인 화상 연결도 어렵다.
기계 한 대 설치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주민들의 인식도 변했다.
병원에 간다는 건 ‘치료받는 일’이 아니라,
어느 정도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운 좋은 선택지’가 되었다.
그마저도 그날 기상이 좋고, 차가 고장 나지 않고,
김 할머니가 연락받았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의료란 단순히 ‘있는 편이 좋은 것’이 아니라,
**"되면 다행,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체념에 가까운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김 할머니의 존재는
그 체념 위에서 겨우 버티고 있는
하나의 비공식 의료안전망인 셈이다.
4. 시스템 없는 마을, 사람만이 마지막 의료망
김 씨 할머니는 말한다.
“나라고 병원은 아니죠.
그냥 내가 아니면 아무도 안 하니까 하는 거예요.”
그녀는 의료인이 아닌데도,
마을에선 의료 시스템 그 자체처럼 기능한다.
그 말 한마디는 마을의 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즉, 이 마을에서 인프라는 사람이며,
제도는 기억이고, 시스템은 관습이다.
문제는 이 구조가 너무 오래되고,
너무 불안정하다는 점이다.
김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게 되거나,
갑작스럽게 거동이 어려워지는 상황이 생긴다면
이 마을은 단숨에 응급 대응력을 상실하게 된다.
회관에 남은 혈압계는 쓸 줄 아는 사람이 없고,
어떤 약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말 그대로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는 마을'**이 되는 것이다.
정부는 ‘의료 공백 해소’를 내세우며
원격진료, 공공의료 확장, 의대 정원 확대 등의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이런 마을엔 정책이 닿지 않는다.
시스템이 작동되려면 최소한의 기반 시설이 필요한데,
이 마을은 그마저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는 김 할머니의 헌신에만 기대기보다는
구조 자체를 전면 재설계해야 한다.
‘사람이 인프라’가 되는 시스템은
단기적으로는 따뜻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위험하고 불안정한 구조다.
마을은 지금,
노인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의료 시스템의 경고등을
이미 오래전부터 켜고 있었다.
그 신호를 듣지 못한 건
그 마을 밖에 사는 우리들이다.
'지방소멸 지역탐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어버린 교실, 마을 도서관으로 다시 태어나다 (0) | 2025.05.24 |
---|---|
폐교가 낙찰된 날, 주민들의 마지막 교가 합창 (1) | 2025.05.24 |
응급차 오기 전, 노인이 자전거로 실려 가는 마을의 현실 (0) | 2025.05.24 |
의사가 떠난 뒤, 주민이 만든 ‘비공식 진료소’ (0) | 2025.05.24 |
‘젊은이 환영’ 현수막 걸린 출산율 0마을 방문기 (0) | 2025.05.24 |
20대의 완전 이탈, 출산율 0마을의 결정적 전환점 (0) | 2025.05.23 |
고령 마을의 유일한 생일잔치: 90세 노인의 날 (0) | 2025.05.23 |
출산 없는 마을의 유일한 택배 기사 이야기 (1) | 2025.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