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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소멸 지역탐구

마을 이장님이 바리스타가 된 사연

by around-the-worlds 2025. 5. 25.

마을 이장님이 바리스타가 된 사연

– 모카포트보다 무거운 책임감을 내려놓은 순간


1. 시골 마을, 이장님의 새로운 아침

 

강원도 평창군의 깊은 산골 마을. 이곳은 계절마다 풍경은 달라도 풍경을 보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말 그대로 '인구 소멸'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조용한 곳이다. 전체 주민 수는 180명도 채 되지 않고, 평균 연령은 무려 74세에 이른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오래전 멈췄고, 폐교된 분교의 운동장엔 잡초가 허리춤까지 자랐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 새로운 바람이 분다는 건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마을에 2022년 가을,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폐교된 분교의 급식실을 활용해 청년 창업자가 카페를 연 것이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커피’를 팔 수 있는 공간이 생기자, 어르신들 사이에선 ‘웬 카페냐’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 낯선 공간이 특별해진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카페의 바리스타가 이 마을의 이장, 김봉기(68) 씨였기 때문이다. 고무장갑과 삽자루를 쥐던 손으로 에스프레소 기계를 다루게 된 그의 하루는, 이제 이른 아침 원두를 가는 소리로 시작된다.

“커피?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죠. 근데 말이에요. 그 진한 냄새가 어느 순간부터 참 생각나더라고요.”

그의 말에는 어느새 커피와 마을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마을 이장님이 바리스타가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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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장님, 에스프레소 기계를 배우다

 

김봉기 이장은 원래 도시의 건설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노동자였다. 사고로 팔을 크게 다친 뒤, 가족을 돌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마을의 잡일부터 회의 주재까지 도맡아 해온 20년 차 이장이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줄어드는 인구, 의미 없는 마을 회의, 갈수록 무기력해지는 공동체의 분위기에 그는 회의를 느끼기 위해 시작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책임은 점점 무거워졌고, 마을엔 어떤 변화의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청년 창업자 이승현 씨가 들어왔다. 그는 지자체의 폐교 활용 사업에 선정되어 '식판 다방'이라는 이름의 카페를 열게 되었고, 김 이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장님이 계셔야 이 마을 카페가 진짜 마을 카페가 되는 거예요.” 그 말에 김 이장은 묘한 책임감을 느꼈다. 처음에는 설거지나 손님 안내 같은 단순한 일을 돕던 그는, 점차 커피 추출기 앞에 서기 시작했다.

“라테는 우유 거품을 얼마나 낼까, 아메리카노는 물을 얼마나 섞나… 솔직히 처음엔 어려웠지. 근데 사람이 커피를 배우는 게 아니라, 커피가 사람을 가르치더라고.”

매뉴얼 하나 없이 몸으로 익힌 그의 커피 기술은, 정량보다 진심이 더해진 맛으로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가 직접 내린 에스프레소를 마시기 위해, 매주 산을 넘어오는 단골 노부부도 생겼다.


3. 커피를 사이에 두고 피어난 대화

 

카페가 생기고부터, 이 마을은 서서히 달라지기 위해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마을회관에서 국을 끓이며 회의하거나, 막걸리 몇 잔으로 소일하는 게 전부였지만, 이제 주민들은 커피를 핑계 삼아 카페로 모여든다. “오늘은 라테 말고 카푸치노 마셔볼까?” 하는 농담이 어르신들 사이에 오갈 정도로, 이 작은 공간은 새로운 일상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다.

김봉기 이장은 이제 단순히 커피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그는 자연스럽게 안부를 묻고, 어르신들의 건강 상태를 살핀다. 외지에서 온 관광객이 오면 마을을 소개하고, 지역 특산품을 추천하기도 한다. 때론 외로움에 지친 마을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상담자 역할도 한다.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러 오는 게 아니에요. 사실은, 누군가랑 눈 마주치고 싶어서 오는 거죠.”
그의 말처럼, 식판 다방은 단지 음료를 파는 곳이 아니라, 말 한마디 건넬 수 있는 장소,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공간이 되었다.


4. 바리스타라는 새로운 이장의 얼굴

 

김봉기 이장은 여전히 자신을 ‘이장’이라 부른다. 다만 마을의 아이들(이제는 귀촌한 청년들의 자녀들)은 그를 '바리 이장'이라 부른다. 말 그대로, 바리스타이자 이장. 이 두 역할은 그가 이 마을에서 맡고 있는 상징적인 얼굴을 보여준다. 그의 하루는 마을 사람들과 커피를 마시고, 마을 외부 사람들과도 소통하는 ‘중간자’로서의 하루다. 이 역할은 단순히 개인의 직업이 아니라, 공동체를 잇는 가교다.

식판 다방이 입소문을 타며 방송에도 소개되자, 다른 지역 지자체에서도 김 이장의 사례를 참고하기 위해 시작했다. 실제로 강원도는 이 사례를 기반으로 폐교 활용 창업 모델을 확대 추진 중이다. 김 이장 역시 최근에는 지역 사회활동가로 위촉돼, 젊은 귀촌 희망자들에게 조언도 하고 있다.

“나는 그냥 내 몫의 커피를 타고 있을 뿐인데, 사람들이 뭔가 특별하게 보더라고요. 사실은, 할 수 있는 일을 한 거죠. 나이 들어도 배울 건 많고, 할 일도 많다는 걸 이제 알았어요.”

그의 눈빛은 깊고 따뜻하다. 커피 한 잔의 온기처럼, 김 이장이 만들어낸 이 변화는 거창하지 않지만, 분명 이 마을에 지속 가능한 희망의 씨앗이 되어주고 있다.